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본명 제임스 얼 카터)가 29일 오후 3시45분쯤 10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그의 고향인 조지아주(州) 지역 언론들이 보도했다. 역대 미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카터는 지난해 2월부터 자택에서 호스피스 간호에 들어간 상태였다. 카터는 1977~1981년 대통령 재임 중 주한미군 철수를 압박해 당시 한미동맹이 심하게 흔들렸다. 실업, 물가 상승 같은 경제 문제에 대외 악재까지 겹치며 현직 시절에는 인기가 없었지만 퇴임 후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재평가를 받았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때 미·북 사이의 중재자로 나섰고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간 만남을 도모했다.
카터는 1924년 10월 조지아의 작은 마을인 플레인스에서 농부이자 사업가인 부친, 간호사인 모친 사이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임관해 해군 잠수함 부대에서 복무했다. 하지만 1953년 부친이 암으로 사망하면서 전역 후 조지아로 돌아와 부친이 운영하던 땅콩 농장과 농기구 등을 취급하는 상회를 물려받아 운영했다. 이후 교육위원에 출마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1970년 조지아 주지사에 선출됐다. 성공적으로 4년 임기를 마친 카터는 1976년 11월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꺾고 당선됐다. 출마 당시 유권자의 2%만 그의 이름을 알았을 정도로 무명(無名)에 가까웠고 정치 경력도 일천했지만, 기성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이 카터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직후 집권한 카터는 서민적인 이미지를 앞세웠다. 외교 노선에서도 인권, 도덕 같은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재임 당시 대외 악재가 줄을 이으며 고전했다. 1978년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노선은 공정함”이라며 파나마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넘긴 것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자국의 이익마저 내버리는 대통령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은 카터를 향해 “국익(國益)을 지켜내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비판했다. 임기 말에는 2차 오일 쇼크, 이란의 미 대사관 인질 사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사태 등을 겪으며 지지율이 급락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 대사관을 점거해 5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삼자 이듬해 특공대를 투입한 구출 작전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끝나 정치적 자질 문제로까지 비화했다. 결국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에게 패배하며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재선에 실패한 인물이 됐다.
1977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당시 3만명에 이르던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한 한국과의 악연(惡緣)도 있다. 외부와 고립돼 대부분이 굶주렸던 북한에 비해 한국이 충분한 성장을 이뤘다고 판단한 카터는 “향후 4~5년 내에 주한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2015년 발간된 그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 한국은 경제력으로나 기술력으로나 충분히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고 봤다”고 돼 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주한미군 철수 반대론이 일었고, ‘북한 군사력이 과소 평가됐다’는 국방부 정보 부서 보고서 등이 나오며 주한미군 철수 계획이 백지화됐다. 카터와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6월 정상회담 당시 이 문제를 놓고 설전(舌戰)을 벌인 사실이 기밀 해제된 외교 문서를 통해 뒤늦게 공개되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미군 철수 공약 이행을 고집하는 카터에게 “주한미군 핵심 전력을 섣불리 빼서는 안 된다” “북한이 (대남 적대) 정책을 바꿀 때까지는 미 2사단이 남고 한미연합사령부가 계속 유지되기를 희망한다”고 맞섰다. 카터는 훗날 이 회담에 대해 “동맹국 지도자와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다”고 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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